산행기

370 10.2.18 천안 개죽산,봉암산,작성산,은석산,상봉산.14km.5:22.맑음-4℃

더더좋은친구 2010. 2. 19. 12:54

 

 370 10.2.18 천안 개죽산,봉암산,작성산,은석산,상봉산.14km.5:22.맑음-4℃

 

 천안57번국도 S원교육원 입구(09:56)-S원교육원(10:00)-능선(10:25)-개죽산POST(10:25)-介粥山(10:48-51)-풍산공원묘원(11:10)-봉암산(11:58-12:00)-鵲城山(12:44-도시락-13:13)-개복고개'은석산1.0km'(13:27)-은석산(13:58-14:05)-박문수 '묘'(14:10-15)-은석사 입구(14:25)-병천1.7km방향표및 이정표(1(14:50)-上峯山(15:01)-병천초등학교(15:18-16:10)-목천ic(16:20)-안성휴게소(17:05)-한남동(17:50)

 

 지난 목요일은 집안 사정으로 산행을 못하여 찜찜하게 지내다 단단히 마음을 다지고, 겨우내 눈으로 덮인 전국의 도로와 산에 지난밤과 새벽에 또한 많은양의 눈이쌓여 어설펐으나 습관처럼 집을 나섰다.

 

 해를 지나고 지난주에 불참하여 2주가 지난 탓인지? 매우 오래간만인것 같이 느껴졌으나 모두모두 반갑고 정다운 산우들을 만나니 더욱 활기차고 화기애애하게 산행을 위해 애마는 출발하여 만남의 광장을 거쳐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서 안성휴게소를 거쳐 57번 도로의 '에스원교육원' 입구에서 애마를 뒤로하고...

 

 곧게뻗은 도로를따라 에스원으로 들어 건물들을 지나 끝의 좌측에 폐기물(쓰레기장) 분류처리 하는곳을 지나 좌측으로 오르는 비스듬한 눈 쌓인 언덕으로 올라 우측의 계곡 능선을 향하여 20여분 쉼없이 올라 능선에서 우측으로 5분여 오르니 우측에 '개죽산POST'란 흰 아크릴 판이 어설프게 잡목에 끼워져 있는것을 바라보며, 벌써 개죽산 정상은 아닐것을 짐작하고 지나쳐 다시 20여분 더 오르니 연약한 기둥에 '개죽산452m'란 정상판과 눈에 덮인 삼각점을 찾아내 디카에 담고 20여분을 진행하니 좌측에 거대한 추모공원 절개지를 대하고, 절개지로 올라 추모공원을 둘러보며 50여분을 진행 봉암산에 올랐다.

 

 봉암산은 정상석과 정상판도 없는 밋밋한 산에 지나지 않았음으로 이곳에도 정상판을 준비해 올걸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남남서 방향의 이곳에서 보기엔 높고 거대해 보이는 鵲城山을 향해 우측으로 하산하여 우측능선을 이용해 넛셀을 하며 쉼없이 40여분 올라 산불감시 카메라와 휴데 폰 중계시설이 설치된 철탑이 우뚝 솟은 봉에 숨가쁘게 오르니 150㎡의 평평한 헬기장이 있었고 삼각점이 있을것 같아 찾아 보았으나 눈에 깊이덮인 관계로 삼각점을 찾지못하고, 정상석과 정상판도 없어 미리 준비해간 '작성산497m'의 '새마포산악회의 65번째 정상판을 부착하고, 넓은 눈덮인 평지에서 20여명이 도시락을 비우고 은석산 방향표의 화살표를 따라 우측의 서쪽을 향해 출발하였다.

 

 육산이었으나 눈이 깊게 덮이고 경사가 심했으며 서쪽 방향을 향한탓인지? 오전에 없던 바람이 세차게 불어 볼이 에이는것 같아 후드를 덮어썼으나 그래도 찬 바람을 다 막아주지는 못하여 한기를 느끼며 개복고개(은석산1.0km)를 지나니 그 심하던 바람은 거짓말 처럼 없어졌고, 계속 30여분간 오르막을 오르니 오늘 처음으로 대하는 정상석과 이정표 방향표 등이있어 등산로가 확실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이곳의 銀石山 은 천안의 5대 명산중 하나라하며, 산이 대순같이 수려하고 수석이 아름답기에 그 이름이 붙여졌는데 정상에 기우 제단이있고 그 아래에 은석사가 있었고 300-400여m의 거리에 '박문수'의 묘가 있었다.

 

 32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 유명한 '박문수'님은 조선 영조때(숙종17년 1691-영조32년 1756)의 본관은 고령이고 호는 기은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관료생활 중 특히 암행어사로 활약한일이 유명하고 어영대장과 우참찬을 지냈으며 암행어사시 부정부패가 현재보다 더욱 심하고 당파 싸움으로 세상이 뒤엉켜 있을때에도 '박문수' 어사가 나타나기만 하면 고을 원님과 산천 초목이 벌벌떨었고, 세무행정과 군사행정에 기여한 공로가 많았다. 사후 충헌의 시호가 내려졌다 하며.

 

 묘에는 화강석으로 된 무신석 두개와 상석 오른쪽 정면에 묘비가있었다.

 묘비는 '박문수'님 사후 61년 후인 1816년(순조16년)에 세워졌다 하고, 묘의 봉분을 얼마전에 성토하고 잔듸도 새로 입혀져 있었다.

 

 오늘날 본 받을사람이 흔치않은 시기에 이렇게 올곧고 훌륭한분의 행적을 내세워 후세들에게 교육의 모토로 삼으면 하는 생각을 골돌하게 하며, 마지막 하나남은 '상봉산'을 향해 가벼운 마음으로 눈에덮인 청솔 숲길의 평탄한 등로를 미소를 지으며, 한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올랐다.

 

 팔각정이 세워져 있었고 철봉과 쉼터가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관세국경관리연수원'이란 문구가 새겨진 기둥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음으로 연수원이 멀지않은 아래에 있을것을 예측하며 소나무 숲을 한가하게 숨호흡을 하며 병천면 소재지를 바라보며 하산하였다.

 

 병천 아우내로 하산하여 병천초등학교를 들어서 100여년전의 유관순님을 잠시 생각하며...

 1902년 12월 16일 천안에서 태어났고.

1915년 선교사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과 어머니 이씨()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그 곳에서 영명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을 만났다. 그후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1920년 9월 28일 옥사하였고,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한다.

 

 기다리는 동안 급히 아우내 장터도 둘러볼겸 순대국을 한그릇 급히들고 돌아오며 100여년 전의 그때 상황을 되새겨 주의깊게 주변을 살피며 '병천초등학교' 교문 근처에 주차된 애마에 올라 후미가 이상없이 모두 돌아온것을 확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귀경하며, 모친상을 당하여 경황중에도 음식(떡과 안주, 복분자술,맥주)등으로 산우들을 즐겁게 해준 '이복순'님 그리고 '김분동'님의 배려에 감사하며, 산행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