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358 09.11.5 청송 주왕산(720.6) 가메봉(883) 15km.5:00.구름17℃.산행기.

더더좋은친구 2009. 11. 6. 11:12

 

 358 09.11.5 청송 주왕산(720.6) 가메봉(883) 15km.5:00.구름17℃.산행기.

 

 중앙고속도로 서 안동IC(09:30)-주왕산 주차장(11:00)-장군봉 갈림삼거리(11:16)-알바(25)-주왕산 진입로(11:47)-통나무보행로(11:56)-전망대(12:05)-주왕산 정상→'대전사2.3km,후리메삼거리2.5km'(12:26)-후리메삼거리'가메봉2.6,대전사4.1,제3폭포1.3km'(13:03)-가메봉정상'대전사6.3,절골5.5,대전사7.3,제3폭포3.9km'(13:55-도시락-14:10)-구 내원마을 산수유재배지(14:46)-구 내원마을 성황당 돌무덤(14:52)-금은광이 입구(15:02)-제3폭포(15:04)-학소대(15:20)-학소교(15:24)-주왕산 진입로(15:41)-대전사(15:43)-기념품 목각 판매소(15:52)-주차장(15:55-16:10)-영주휴게소(18:15)-문막휴게소(19:20)-강변역(20:20)-합정동(20:55)

 

 지난주는 늦 가을 만산이 홍엽으로 물든 진안의 아기자기한 성재산의 성봉과 장군봉, 금만봉, 왕사봉등을 다녀와 일주일을 즐겁고 건강하게 생의 활력을 불러넣어 더욱 보람있는 나날을 보냈다.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청송 부동면 상의리 주차장에 들어서자 이번산행의 목적 코스인 좌측의 장군봉과 연화봉이 눈길을 끌었으며, 대전사를 돌아서자 시루봉과 중앙에 급수대와 학소대 우측으로 관음봉, 주왕산등이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주왕산(720.6m)은 한반도 산맥의 중심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등줄기인 태백산맥이 국토 동남부로 뻗어나온 지맥에 위치하며, 수많은 암봉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빚어내는 절경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3대 암산의 하나이다.

 

  이번 코스는 선두의 A조는 우측의 장군봉으로 올라 '금은광이'를 지나 '두수람'까지 오를것이며...

  B조는 우측의 주왕산을 경유하여 후리메기 삼거리에서 제2폭포로 하산하기로 계획을 하였음으로...

  본인은 4년전 2005년 11월 30일 세명이, 눈이 허옇게 쌓인때에 세밭골로 올라 금은광이 삼거리에서 좌측 능선을 따라 '장군봉'으로 하산하였으며, '가메봉'은 2003년 11월 18일에 절골에서 긴 계곡을 따라올라 내원마을로 하산했던 것이 생각나, 이번에는 B조를 따라 '주왕산'을 오른후 '후리메기'로 하산하여 후리메기 삼거리에서 '가메봉'으로 올라,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진 구 내원마을로 하산하여 제3폭포를 경유하여 원점회귀 하려고 '주왕산'진입로를 찾아 올랐으나 진입로를 놓치고 제2폭포 방향표를 보는순간 이곳은 너무 오른것을 직감하고 퇴행하여 '아름다운 가을단풍 안전한 가을산행'과 '주봉탐방 부분통제실시'란 펼침막이 걸려진 곳으로 들어 알바한 시간만큼 만회하기 위해 빠른 발걸음으로 20여분후 B조(4조) 조장을 만나 사정을 얘기하고 잠시함께 산행하고 진입로 입구에서 35분 후 '주왕산'정상에 올랐다.

 

 칼등 고개에서 우측으로 갈림길이 가메봉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을것을 예측하고 유심히 살폈으나 실패하고 '후리메기' 삼거리로 내려가 그 곳에서 2.6km의 이정표를 참고하여 시간상 빠듯하겠다는 예측을 하여 그곳 부터는 단독 산행으로 우측으로 오르기 시작하여 1.3km구간은 너덜 길이었으나 원만하였고, 1.3km는 계속되는 가파른 길이었으며 막판의 400여m는 돌 계단과 나무계단이 기다리고 있어 시간에 쫒기고 가파름과 계단에 억눌리었으나 간간히 만나는 절골쪽에서 올랐다는 하산하는 산군들을 스치며 용기를 얻고 분명한 등로에 힘입어 2.6km를 50여분에 오를수 있었다.

 

 여의치 않으면 도시락도 거를 속셈이었으나, 시간을 보니 느긋하지는 못하나 서둘러 도시락을 먹을 시간까지 되어,'가메봉' 정상엔 정상석과 삼각점도 발견치 못하고 국립공원공단에서 세운 추락주의 경고판 밑에 '가메봉 해발882m'란 표시판 옆에서 디카에 담기고, 북동쪽과 남서쪽의 확터진 곳을 배경으로 동영상과 사진을 담은후 서둘러 하산하였다.

 

 정상에서 우측으로 300-400여m를 진행후 우측은 절골행 좌측은 내연마을행을 확인후 좌측으로 방향전환하여 내리막을 내려왔으며, 10여분후 하산길을 나무계단과 돌계단으로 정비하는 작업원들이 한창작업 중이었으며, 원목으로 제작한 교량을 몇개건너 정상에서 빠른 걸음으로 50여분 후, 구 내원마을에 도착하였다.

 

 산수유 재배지를 지났으며, 전국에서 전기없는 마을로 알려진 내원 마을은 알려진대로 집터였을 흔적만 남아있을뿐 잡초와 억새 군락지로 평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 상황을 설명하기위해 '주왕산 국립공원 환경저해시설 철거' 안내판이 대신하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옛 성황당의 돌무덤이 잘 정비? 관리된듯 하였다.

 

 내원 마을이었던 곳에서 40여분후 우측으로 들어 제3폭포의 웅대함을 느낄수 있었으며 폭포 소를 전망하기 위한 전망대가 유효적절히 건립돼 있었고, 소의 주변을 둘러쳐진 목책의 보행로 또한 운치를 더해 주었다.

 우뚝 솟은 기암절벽이 폭포와 소가 어우러진 신비스런 경관, 청학과 백학이 노닐었다는 학소대...

 주왕이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올려 식수를 길어먹었다는 쓸어질듯 솟아오른 급수대...

 

 주왕이 신라의 왕이라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주왕은 진나라에서 복야상서 벼슬을 지낸 주의라는 사람의 9대 손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이 '주도'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범상치 않았을 뿐 아니라, 5세 때 이미 글을 배워 11세 때에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을 통달하였고 천문지리(天文地理)에도 능했다고 한다.

 

 '주도'는 이때부터 왕후장상을 꿈꾸면서 “황하강의 물을 들이마시고 태산을 갈아 없애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주도는 진나라의 후손 중에 큰 인물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그는 성인이 되자 장사 1백명을 거느리고 웅이산에 들어가 1만여 명의 군중을 모으고 남양땅에 웅거하였으니, 이때가 당나라 덕종 15년(799년, 신라 소성왕 1년)이었다.

 

 주도는 스스로 후주천왕이라 칭하고 장안(長安)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곽자의(郭慈儀)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고 말았다. 곽자의에게 패한 주왕은 요동으로 쫓겼다가 다시 신라땅으로 도망오고 말았는데, 그때 주왕을 따르는 군사는 1천여 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주왕이 숨었다가 숨진 전설의 주왕굴 ~그리고 비경 폭포!~


 주왕산 제1폭포는 학소대의 우람한 바위틈을 뚤고 흐르는 듯한 길이는 짧으나 소는 하트 모양으로 물이 많지않은 만추임에도 흐르는 계곡에 퍼지지 못한 물소리는 우렁찼다.

 

 이곳은 주왕산을 비롯한 '주산池'와 달기폭포, 달기약수탕, 주왕산 1,2,3폭포, 절골계곡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주왕산'을 비롯한 절골에서 오르는 '가메봉' 왕거암'드지미재'먹동재'먹구등'두수람'금은광이'장군봉'연화봉'시루봉'관음봉'등 수없이 많은 괴암 괴석의 봉이 둘려쳐져 있었음으로 늦가을의 단풍을 겸한 즐거운 산행이었으며...

 

 다른곳과 다르게 청송군에서 관광객과 등산객을 위하여 사과를 하나씩 나눠주는 배려에 더욱 예기치못한 고맙고 흐뭇한 마음이었으며 하산후는 눈치것 국립공원공단 직원들이 가을의 꽃으로 분류되는 '감'을 따는 곳에서 잘익은 홍시를 시장하든 차에 몇개 달게 얻어 먹고나니 부러울게 없었으며, 물건파는 곳을 그냥 지나기 민망하여 대추를 산후 또다른 물건을 살피던 중 내원 마을에서 조각을 하여 특기를 살리고 생활에도 보탬이 되는 일을하든 '털보'아저씨가 눈에띄어 양해를 구하고 디카에 한컷 담았으니 이것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담은것 또한 큰 알찬 수확이 아닌가 한다.

 

 산행으로 몸에 유익한 산소를 마음껏 마시고 몸속에 저장하여 건강을 충전하고 돌아와 여유로운 마음과 몸이되어 생활의 활력이  될것으로 믿으며...

 요즘 우리 산악회의 중심인 '김신원'님이 몸의 사정으로 몇주 참여치 못하여 산행할때는 물론 평상시에도 가볍지 않은 마음임으로 속히 건강이 쾌차하여 가볍게 전과 같이 오지산을 함께 날아다니 듯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산행기를 마친다.